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라엘 왕국 (문단 편집) === 분열 이후 === ||<-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20px-Kingdoms_of_Israel_and_Judah_map_830.svg.png|width=100%]] || ||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 || [[여로보암 1세|여로보암]]의 국왕 즉위와 [[유다 왕국]]의 건국으로 히브리인의 영토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 왕국과 대등하게 분열되었다는 관점에서는 이후의 이스라엘 왕국을 (남)유다 왕국에 대비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분열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이름을 따 '[[사마리아]] 왕국'이라 일컫기도 한다. 분열 이후로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그저 그런 나라로 살았다. 북이스라엘은 오므리, 아합이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 제법 강성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주변국을 완전히 지배하진 못했다. 그저 있는 영토를 지키거나 건국 수준의 영토를 회복하거나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나름의 맹주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사실 이 두 나라가 처참한 약소국이라기보다는 그냥 주변국과 비등비등한 그런 국가 수준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일단 성경의 기록을 신뢰하고 본다면 주변국에 비하면 두 나라가 지나치게 약소국인 것은 아니다. [[이집트]],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같은 나라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약소국인 게 맞지만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필리스티아]], [[에돔]], [[모압]], [[암몬]], [[아람]] 등과 비교해보면 이들을 단기간 복속한 기록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이들에게 복속당한 기록은 없다. 판관기에서는 몇 번씩 단기간 복속되곤 했던 것과는 차이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사이는 좋았던 기간도 있었지만,[* 이 경우는 오므리 왕조 시기로 이 때는 결혼 동맹 때문인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이것도 현대의 연구로는 이스라엘 왕국이 갑이고 유다 왕국이 을인 관계지 동등한 관계는 아니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대개는 나빴던 기간이 많았다. 초창기엔 허구한 날 싸웠고, 예후 왕조 시기에도 [[여호아스|요아스]]와 [[아마샤]]가 벳 세메스에서 회전을 벌였다. [[예후 왕조]] 이후의 혼란기 시절에 즉위한 베가가 아람-[[다마스쿠스]] 왕국과 연합해서 유다 왕국을 치기도 하였으나, 유다 왕국의 구원 요청에 응해 달려온 [[신아시리아]] 제국의 명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역관광당했다. 이스라엘 왕국은 10개 지파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과거 판관들처럼 [[부여|지파별로 돌아가면서 왕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왕가의 힘은 귀족들의 견제 때문에 약했으며]],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 지파가 오히려 왕보다도 막강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꾸준히 [[금송아지]] 숭배를 추진한 것 역시 이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페니키아계 도시인 시돈의 공주와 결혼한 아합은 아예 이방신인 [[바알]] 신앙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래서 왕이 10지파를 대표할 자격이 없거나 의심되면 [[쿠데타]]도 손쉽게 벌어졌고, 실제로 8번이나 왕가가 바뀌었다.[* 심지어 초기 시절인 여로보암 왕조와 바아사 왕조의 경우 초대 왕(여로보암 1세, 바아사)이 죽고 얼마 안 가서 무너졌다. 시므리 왕조는 아예 시므리가 7일 만에 비명에 가 최단명 수준으로 무너졌을 정도, 이 때문에 초기에는 오히려 유다 왕국이 더 안정적인 편이기도 했다. 그나마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가 오래가고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후로는 말짱 도루묵... 심지어 앞서 말한 시므리 왕조, 살룸 왕조, 베가 왕조, 호세아 왕조처럼 1대로 끝난 왕조도 있다. 특히 시므리 왕조 빼곤 전부 말기에 존속했다. 즉 말기로 갈수록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 심지어 즉위 3년 내에 시해된 왕도 수두룩하다.][* 성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게 다 하느님 제대로 믿지 않아서다!"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예를 들면 금송아지 숭배를 시작한 여로보암 1세에 대해서는 그 죄악으로 아들이 죽고 집안도 멸문당했다고 설명하고, 바알 신앙을 받아들인 [[아합]]의 경우 그의 오므리 왕가를 멸한 [[예후]]가 장군 시절에 기름 부음을 받으며 오므리 왕가와 바알 숭배를 없앨 것을 명령받았으며 그 덕에 예후 왕가가 예후 다음으로 4대까지 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단 그렇다고 쳐도 북이스라엘은 존속 기간 내내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했기에 우상 숭배와는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바알 숭배와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아합 시절에 선지자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패했을 때 엘리야가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제거한 바 있기 때문.] 반면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만의 왕국이나 다름없어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자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도 자신은 보잘것없는 족속 출신이라고 왕이 되길 두려워했으며, 베냐민 지파는 12지파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가는 등 상당한 약소 지파였다. 그리고 이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함께 유다 왕국을 구성했다. 물론 시므온 지파도 유다 지파와 반절쯤 함께 있긴 했는데 이쪽은 판관기 시점에서 많이 동화된 상태였다.] 다윗의 언약을 명분으로 왕권 강화와 세습을 이어갔다. 이 시기쯤에 히브리인의 종교 역시도 격변하는데, 주변의 다신교 주민들과 교류하고 병존하며 다소 느슨하게 유일신 개념을 믿던[* 다소 느슨하다고는 했지만 나름 부패한 상태였다. 제사장들이 성경 작성자와 선지자들에게 까일 정도였고, 성소 안에서 금지된 행위를 일삼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소 느슨한 유일신 개념'조차도 희미해서 가령 야훼를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 신앙을 믿거나 아니면 유일신인데 그게 야훼는 아닌 그런 신앙을 믿는 등 참 복잡했다. 애초에 이스라엘 땅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도 여러 이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고 그만큼 신도 종교도 엄청 다양했다.] 히브리인들은 이 시기를 겪으며 우리가 아는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는 유다 왕국의 이야기이고 이스라엘 왕국에게는 야훼 신앙에 근거한 정통성이 없었기에 여로보암 1세는 금송아지 숭배를 시작했고 이후로도 금송아지 숭배 등 다른 신앙을 가졌으며, 심지어 오므리 왕조의 경우 이민족 신인 바알을 숭배하기도 했으며 유다 왕국에서도 잠깐이지만 이민족 신을 믿기도 했다. 그나마 예후 왕조 정도가 이민족 신을 숭배하는 것이 없었던 것 정도 물론 정통 야훼 신앙을 간직한 이가 없는 건 아닌지 북이스라엘에서도 선지자들이 나왔다. [[엘리야]], [[엘리사]] 등이 북이스라엘 출신. 국력은 북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 왕국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였다. 초기에는 잦은 왕조 교체로 남유다에게 패배하기도 하는 등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오므리가 오므리 왕조를 연 후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했고 [[아합]]은 [[페니키아]] 공주 [[이제벨]]과 혼인하고, 딸 [[아달리야]]를 유다 왕비로 시집 보내는 등 페니키아, 아람, 유다를 연합한 맹주가 되어[* 다만 이는 임시적이고 아람과는 다시 사이가 나빠져서 결국 아람과 벌인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전사한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 일은 큰 의미를 갖는데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1세기 동안 늦췄다고 평가받기 때문, 그러나 예후의 [[역성혁명]]으로 주변국이 적대 관계로 돌아서자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해 다시 말짱 도루묵...][* 심지어 아합 시절에 아달리야를 유다 왕비로 보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사실상 오므리 왕조의 지배에 들어간다. 허나 북이스라엘은 아합 사후 2대 12년 만에 예후의 쿠데타로 이스라엘은 아딜리야가 다윗 왕조의 반격으로 오므리 왕조가 멸망한다. 다만 그 잔재는 계속 남았는데 아합의 딸, 아달리야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고 이후 아달리야가 폐위당하고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아달리야의 외손자였기에 모계 혈통으로나마 오므리 왕조의 혈통은 다윗 왕조에서 살아남는다.] 허나 종교적으로 아합이 들인 바알 신앙과 기존의 야훼 신앙이 대립하는 등 혼선이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들어선 예후 왕조 시기에 이르러 바알 신앙은 완전히 뿌리 뽑히지만 여로보암 1세 시절부터 이어진 금송아지 숭배는 뽑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후 왕조의 여로보암 2세 시기는 북이스라엘 초기에 맞먹는 영토를 이루는 등 나름대로 전성기를 구축했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 사후 나라는 기울기 시작하여 왕위를 이어받은 즈가리야가 반년만에 살해당해 예후 왕조는 멸망했고 이후 멸망할 때 까지 30년 동안 4개 왕조 5명의 군주가 즉위하는 초기에 맞먹는 대혼란에 빠진다. 특히 베가 왕조 시기, 대부분의 땅이 아시리아의 손에 넘어가[* 성경에는 르우벤, 므낫세, 갓 지파의 영역이 아시리아의 손에 넘어갔다고 말하는데 그럼 남은 땅은 사실상 에브라임, 단 지파의 땅 뿐으로 과장 보태면 남유다 왕국의 영토에 변화가 없었다면 남유다 왕국 절반 정도 되는 영토로 축소되었다는 얘기다. 예후 왕조 초기에도 많이 털려서 영토가 크게 축소되긴 해서 이런 일이 없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때는 힘만 좀 기르면 회복할 역량은 있었다. 실제로도 예후 왕조 초기가 딱 이 꼴이었다가 여로보암 2세 시절에 건국 시절에 맞먹는 영역을 회복했다. 근데 그게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 북이스라엘은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호세아 시기에 신[[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으로 3년간의 사마리아에서의 공성전에서 패배하여 멸망하고, 왕족과 귀족을 포함한 적지 않은 백성이 살해당하거나 아시리아가 당시에 훗날 페르시아를 건국하게 될 [[이란]]계 야만족들을 격파하고 새로 얻은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 동부로 끌려가 사민되었다. 이에 반해 [[유다 왕국]]은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쳐서 아시리아로부터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유다 왕국이라고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히즈키야]] 시대에 선택지를 잘못 골라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엄청난 공물을 바치고 땅도 대거 뜯겼으며, 전 국토가 약탈과 살육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도 이건 최악은 아니었던 것이 다른 나라들은 죽도록 두들겨 맞는 게 아니라 [[멸망|그냥 죽었다.]] 북이스라엘 왕국도 이 테크를 따라 망했다. 그나마 다음 왕인 [[므나쎄(유다)|므나쎄]]가 현실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여 통치했기에 살아남은 것.] 북이스라엘 왕국에 남은 유민들 중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으로 유다에 가까웠던 사마리아 근처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게 된 반면, 그보다 북쪽 갈릴리, 즉 옛 분리 이스라엘 왕국 북부 이스라엘인들은 유다의 동화 정책에 상당히 순응한 데다 유다인들이 그 일대로 많이 이주하게 된 탓에 정체성 자체는 유다인들과 동일해지게 된다.[* 물론 촌구석 사람들이란 비아냥은 받았으돼 사마리아인들마냥 혼혈인이라고 손가락질받진 않았다. 좀 못 사는 지역에 사는 같은 나라 사람들 취급이었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유대인들도 압몬, 모압, 에돔 등과 혼혈되었고, 사마리아인들의 혼혈과 이질성이란 측면 또한 유대인들이 상당히 부풀려서 악선전한 측면도 많았지만.] 한편 운 나쁘게 메소포타미아 동부로 끌려가 식민된 소위 말하는 이스라엘 열 지파의 운명에 대해 더 알아보면, 얼마 못 가 이란계 야만 부족들이 이를 갈고 앗시리아를 쳐들어와 맹공을 가했기에 아시리아는 정작 이스라엘 열 지파를 식민했던 지역을 포기하고 국경선을 서쪽으로 되물린다. 이후로 그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유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부는 후퇴하는 앗시리아를 따라 서쪽으로 피난가거나, 이란계 부족들의 맹공과 약탈에 살해당하거나, 그대로 남아 이란인들에게 동화되었다고 추측할 뿐. 어느 경우든 이들이 이스라엘인으로서 정체성을 잃고 현지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